인도 관광

(India Tour )

Taj Mahal, Agra
Picture of Taj Mahal

무굴 제국은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인도를 통치했던 이슬람 왕조이다. 제국 전성기의 황제, 자한(Shah jahan, 1592-1666) (아내)  뭄타즈 마할(일명 아르만주드) 끔찍히도 사랑하였다. 황제는 변방을 정벌하러 가는 원정길에까지 아내와 동행하였다고 한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가 14번째의 아기를 낳다가 그만 숨지게 된다. 급작스런 비의 죽음에 황제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하루 저녁에 황제의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아내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황제는 아내를 그리워한 나머지, 영혼을 위한 궁전을 무려 22년에 걸쳐 짓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아 있는 타지마할이다. 또한 황제는 궁전을 완성한 다시는 그런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건설에 참여했던 장인들의 손목을 모두 잘라버렸다고 한다. 혹자는 황제가 살아있을 당시 "희대의 건축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 아내를 향한 사랑보다 후세사람들에게 그의 치적을 알릴 거대한 기념비를 짓는데 대한 열정이 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의 수도인 아그라 남쪽, 야무나강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마치 신의 보좌가 낙원 위에 있듯이 정원 위에 우뚝 있다. 능묘를 둘러싼 개의 첨탑은 하늘로 솟아오른 건물 전체에 균형미를 더해 준다. 아래에는 양쪽으로 붉은 사암으로 채의 건물, 모스크와 곳을 성스럽게 주고 있다. 전면에 펼쳐진 화원은 코란에 나오는 같은 낙원의 모습으로 갖가지 향기를 뿜는 꽃과 유실수로 꾸며져 있다. 타지마할은 거대한 성채 속의 묘지공원이고 세계 최고의 대리석 건축물이다. 붉은 사암으로 거대한 정문의 아치를 통과하면, 넓은 마당에 수로를 전형적인 무굴 양식의 정원과 분수가 마치 페르시아 양탄자(길이 275m)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앞에는 정원과 분수를 굽어보며 완벽한 대칭의 미를 드러내는 타지마할이 우뚝 있다. 넓게 트인 공간에 홀로 우뚝 있는 거대한 풍채는 다가서는 사람들을 신비한 기운으로 사로잡는다. 중앙의 능묘, 좌우의 모스크, 앞쪽의 격자 형태의 정원, 타지마할의 영상이 비치는 일자형 수로, 속의 분수대, 모퉁이의 미나렛 minaret, 산책로 등이 마치 황제의 보좌 앞에서 문무백관 전원이 열병식을 하듯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델리 Delhi

면적은 1,483, 인구는 981 7439(2001)이다. 인구의 대부분은 올드델리와 뉴델리에 집중해 있다. 델리 직할지구는 올드델리로 려진 델리와 새로 생긴 뉴델리와 주변지역으로 이루어진다. 갠지스강의 지류인 야무나강의 서쪽 기슭에 있으며, 펀자브 지방과 갠지스 유역과의 교통 중심지여서 고대부터 지방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1718세기에 이슬람교 무굴 제국의

Picture of Qutabminar 수도로서 특히 번영하였으며, 다시 1912 캘커타를 대신하여 당시 영국령 인도 전체의 수도로 정해져서 더욱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1931 이래 남쪽 교외에 새로운 도시 뉴델리가 건설되어 정식 수도가 되었다. 올드델리는 고대 이래 7차례나 다시 건설되었으며, 현재의 것은 1638 샤자한제() 건설한 것으로서 샤자하나바드란 별칭이 있다. 당시의 유적으로서는 빨간 사암(砂岩)으로 쌓은 성벽(랄키라) 있고, 안에는 궁전이 여러 군데 있다. 특히 보석을 박은 벽이나 대리석 기둥이 있는 디와니이하스트 궁전은 유명하다. 성의 남서에는 인도 최대라고 하는 자마마스지드 이슬람교 사원이 있다. 성의 카시미리문() 부근은 19세기 중엽의세포이 반란 격전장으로서 기념탑도 있다.

다시 동서로 뻗어나간 거리(찬도니 초크 거리) 구시가지 제일의 번화가로, 상점이나 군중에게서 전통적인 인도 도시의 특색을 있다. ··상아 전통적인 미술공예품의 생산이 성하다. 델리대학·자와하를랄네루대학 농업·기술·의학 등의 여러 연구소가 있다.

 

Front view of Dehli Fort

Lal Qila (Red Fort)

무굴 황제 자한이 아그라로부터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기위해 만든 .

붉은 성벽으로 쌓여 있어 낄라(레드 포트, 붉은 )이라 불린 성은 9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 되었다. 이성을 만든 왕은 자한 이지만 실제 이용한 이는 자한을 아그라 포트에 죽을때까지 가두었던 자한의 막내아들 아우랑제브였다.
레드 포트는 1857 인도인들의 영국에의 대규모 저항때 크게 손상되었으며

총독 쿠르존경에 의하여 1903년에 복원되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India Gate in Delhi


India Gate in Delhi - The Famous Monument of  India인도 정치의 심장부라고 하는 비자이 초크에서 동서로 뻗어 있는 라지파트 거리 동쪽 끝에 있다. 1 세계대전 영국을 위해 싸우다가 죽은 병사의 넋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높이 42m 아치에는 9만여 명의 장병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31년에 완성되었으며, 1972년에는 인도독립 25주년을 기하여 불멸의 불이 점화되었다.

 

 


Other places of interest

FATEHPUR SIKRI

Palace of fatepur Sikri

16세기 아그라 남서쪽 37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크바르대제가 살던 ()이라 한다.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유적이 그다지 손상되지 않은 남아 있으며, 힌두와 이슬람의 문화적 융합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이라 있다. 유적의 남쪽 부근에 웅장한 불란드 (Buland Dsrwaja) 가진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있고, 아크바르에게 아들 탄생을 예언 했다는 예언자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여기에 살던 예언자의 에언에 의해 사내 아이를 얻은 아크바르가 1574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마 마스지드 사원은 인도에서 가장 모스크 라고 한다.

 


Rajasthan.

라자스탄의 색깔은 사막의 색깔이라 할수 있을 만큼 처음보는 이로 하여금 황량한, 그러나 강렬한 느낌을 누구에게도 전해주는 곳이다. 라자스탄을 남과 북으로 나누는 아라발리(Aravalli) 산맥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데, 북쪽에는 파키스탄과 공유되고 있으며 타르(Thar) 사막을 가진 자이살메르(Jaisalmer), 비카네르(Bikaner), 조드뿌르(Jodhpur) 등이 있고 남쪽으로는 숲과 계곡이 있는 자이푸르(Jaipur) 우다이푸르(Updaipur)등의 도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AD 4~5
세기경의 굽타 시대에 이르러 인도의 색을 가지게된 라자스탄은 그곳의 전통과 특색의 바탕이 되는 무사족 라지푸트(Rajput) 천여 년동안 지배자 계급으로 이어오면서 라자스탄의 역사를 만들었다. 왕가의 자손들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이용하여 자신의 신분을 지칭한 라지푸트들은 지배계급과 영합하거나 자체세력을 형성하는 등으로 발전하며 라자스탄의 역사를 이루어 왔다. 이들은 회교세력과 격렬한 전투를 지속적으로 벌여 왔으며 무굴제국 이전까지 델리의 술탄들과도 끈질긴 전쟁을 벌여왔으나 무굴왕조를 시작한 제국의 왕들과는 타협의 관계로 돌아섰다. 이때의 시대적 조류를 가장 라지푸트들이 암베르에 근거를 두었던 왕조이며 자이푸르를 건설했던 만싱이다. 영국통치시절에도 영국인의 인도 통치에 대한 좀더 쉬운 접근책으로서 라자스탄의 라지푸트들에 대한 기득권 인정을 통하여 라지푸트들은 여유있는 생활을 구가하였으며 독립후에도 중앙정부와의 협약을 통하여 자신들의 돈과 특권이 보장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인드라 간디 수상의 조치로 자신들의 특권이 상당부분 사라짐으로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라지푸트들의 후예들은 그들의 성을 관광객들에게 숙소로 개방함으로써 경제적인 타격을 모면 하고자 했다. 라자스탄의 또한가지 색깔은 화려한 그들이 옷색상이며 색상은 인도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원색적이며 강렬한 색을 띠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그내들의 삶에 단조로우면서도 격정적인 무언가를 표현하고 하는지도 모른다.


Aurangabad

인구는 87 2667(2001)이다. 무굴제국 6 황제 아우랑제브 황태자로 있을 데칸 지방의 태수(太守) 부임, 이곳을 중심으로 시정을 폈기 때문에 아우랑가바드라는 지명이 붙게 되었다. 아우랑제브 왕비의 묘소를 비롯하여 1610 도시를 건설한 M.암바르의 모스크 등이 남아 있다. 아잔타 엘로라 석굴사원으로 통하는 길목에 해당하며 시내에도 37세기의 석굴사원이 있다.

 

 




 


Mumbai

서고츠산맥에서부터 아라비아해로 반도 모양으로 뻗어난 인도 최대의 도시이며, 국제무역항과 국제공항이 있다. 1995 11월에 봄베이(Bomay) 뭄바이로 개칭하였다. 인도 본토와 좁은 수도(水道) 분리되어 있는 뭄바이 섬의 남단에 위치한 뭄바이도 16세기까지는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뭄바이 섬은 고대그리스의 톨레미(프톨레마이오스) 세계지도에 수록되어 있듯이 7개의 작은 섬에서, 토착민들이 어업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1534년에 이곳을 지배하던

토후(土侯) 바하두르 샤가 포르투갈에 권익을 넘겨주었으며, 1662년에는 포르투갈 국왕이 누이동생 캐서린과 영국의 찰스 2세와의 결혼 , 지참금의 일부로서 이곳을 영국에 양도하였다. 찰스 2세는 당시 양항(良港) 찾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연간 10파운드의 금과 교환하여 7개의 섬을 처분하였다. 이때부터 동인도회사에 의한 해면매립과 항만건설 도시건설이 시작되었다. 18611865 미국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인도 목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뭄바이는 목화의 집하지·적출항으로서 활기를 띠게 되었다.  1869 수에즈 운하가 개통됨에 따라 인도에서 유럽에 이르는 최단거리에 위치한 뭄바이항은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다. 인도 전국에 철도망이 완비되자 뭄바이는 인도 서해안 최대 경제 중심지로서 발전하였다. 항만기능은 인도 최대로서 전인도 무역량의 1/3 취급하며, 목화·곡물·종자 등의 수출과 공업제품·금속·기계류 등의 수입으로 인도의 대외무역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 공업면에서는 19세기 중엽부터 창업한 근대 방적업이 발전하여, 아마다바드시() 다음으로 인도 2 생산실적을 올리고 있다. 밖에 기계·조선·인쇄·식료품 등을 비롯한 각종 공업이 발달하였다. 북쪽 교외에서는 석유정제 기지가 있으며, 원자력발전소도 가동하고 있다. 반도부의 남동단에 프린세스(1880완성빅토리아(1888)·알렉산드리아(1914) 등의 (船渠) 자리잡고 있다.  중심은 반도부 남동부의 뭄바이 성채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는 처치게이트로() 부근이며, 관공서·회사·은행·학교·박물관 등이 늘어서 있다. 근교에는 인도 원자력연구소가 있으며, 백만() 면한머린드라이브 뭄바이 시민의 자랑인 해안도로이다. 이곳을 바라보는 야경(夜景)여왕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라는 별칭이 있듯이 아름다운 근대도시의 경관을 이룬다. 남동부에 바다에 면한 유명한인도의 있는데 이는 1911 영국 국왕 조지 5세와 메리 여왕의 인도방문을 기념해서 세운 것이다. 석조의 문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혼합양식으로 16세기 구자라트 지방의 석조문을 모델로 하였다.